서울로망쓰 2018. 5. 19. 21:51

대학교 1,2학년 때는 술 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3,4학년 때에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도서관에서만 시간을 보냈었다. 


독서실 타입의 빽빽한 공간은 싫어서, 항상 책이 놓여있는 서가 근처의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책상에서 공부하곤 했었는데, 그러다 지겨워진 어느 날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별로 유명하지도 않아서 이름을 기억할 수 조차 없는 독일 작가의 동화하나를 순식간에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하루' 

세상의 하루를 만들어내는 어느 공간에는 매일 새로운 '하루'들이 출격대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2018년 5월 19일을 담당하는 A라는 하루가 있고, 2018년 5월 20일을 담당하는 B라는 하루가 있는데, 이들은 해당날짜에 지구에 내려와 그날 하루의 지구에 일어나는 모든일을 총괄하고, 그날이 끝나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셈이다. 자기의 생애에서 딱 하루만 지구에 올 수 있는 셈.


모든 하루들은, 자기의 차례가 다가와 지구에 내려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지구에 다녀온 후에는 자기의 하루는 어떠했노라하고 회상하며 남은 생애를 지내게 되는 식이다. 


예를들어, 1945년 8월 15일을 담당했던 놈은, 

"내가 지구에 갔을때는 말이야. 한국에서 이런이런 큰일이 일어났었지.." 이런식. 


아무튼 가장 화끈한 일이 일어났던 하루를 담당했던 녀석이 슈퍼스타가 되는 곳이다. 별 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하루는 그저 그런 삶을 살게 되는 식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하루도, 자기의 하루동안 무슨일이 일어날 것인지 무척이나 기대를 하고 지구로 내려온다. 


드이어 날이 밝고, 처음보는 지구의 광경을 주인공인 하루는 넋을 잃고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 지구의 아름다움에 오전을 행복하게 보내지만, 주인공은 슬슬 초조해지고 마는데, 오전동안 전 세계에는 특이한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지나도, 그날 하루는 정말로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주인공인 하루는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을 본 것에 만족하며 복귀하지만, 복귀한 후로 수 많은 '하루'들의 비웃음을 사는데, 그건 재미나고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주인공 하루는 그런 상황에 우울해지고, 자기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지를 자책하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소설은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그 지겹던 하루가, 지구 역사상 최초로 전 세계에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던, 사고 발생 0의 날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오늘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왜 이 소설이 떠 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하루하루의 불평불만에만 쌓여있어서, 하루의 아름다움을 미처 보고 있지 못하니까, 이런 생각이 나는 것이겠지.